죽기전에 꼭가봐야할 자연절경,유산/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자연절경,유산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자연절경 61, Colorado National Monument

세인트1 2015. 9. 21. 19:59

한번 올렸던 곳이라서 오늘은 다른 불로거의 글을 펌했습니다.




( Colorado national monument 의 information office 입구의 Joho otto  청동상   )

 

처음 들어보는  국립공원이기에 별반 기대도 안하고 가보았다. 

방문객도 거의 없는 공원 입구에서 보이는 협곡이 심상치가 않다. 

매표소 아저씨 이야기론 드라이브 코스가 약 40 km 란다.

그런데 조금 가보니 기암절벽에 장대한 협곡에 푸른색, 붉은색, 쵸코렛색 등 거대한 붓으로 페인팅 한 것 같은 colorful 한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지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드레일 등도 거의 없다.

아찔한 현기증이 나고 헨들을  두손으로 꼭 잡는다. 

좀 돌덩이라도 같다 놓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들 정도로 절벽 밑이 아찔하다.  

 

정상 부근의 information office 를 찾았다.

입구에서  이곳 국립공원의 아버지란 분의 동상을 보았다.

여지껏 국립공원 앞에서 처음 본 동상이기에 호시심이 났다.

이 분은 누구길레 동상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

그동안 시간 나는 대로, 외국 문헌과 web  찾아 John Otto 에 대해 찾고 또 찾아보았다.

 

지금 부터 알려지지 않은 John Otto 의 슬픈 사랑의 애환이 담긴 Colorado National Monument 에 대해서 들어간다.

 

  

" I came here last year and found there canyons and they feel like the heart of the world to me.   I am going to stay and build trails

promote this place because, it should be a national park.  " ( 작년에 왔었을때 저는 이곳 케뇬이  세계의 중심지라는   느낌이 왔어요.  저는 이곳에 머물면서 등반로를 만들고 적극 홍보에 앞장 서겠습니다.  왜냐면 이곳은 국립공원이 될테니까요.)

 

1906 년 이곳에 혼자 머물던 John Otto 는 다음해 위의 서두로 시작되는 편지를 모든 신문사와 연방정부에 쉬지 않고 보내기 시작한다.

결국 그의 지극 정성에 1911 년 5 월 24 일 Willam Taft 대통령은 국립공원 승인에 sign 을 하고,  매달 1 불의 월급을 받으며 Colorado National Park 의 최초의 국립공원 관리인이 된다.

 

너무나 끼뻤던 그에게 또 하나의 경사가 일어난다.

바로 New Hamphire 출신의 화가인 Beatrice 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린다. 

 

혼자서 450 feet 나 되는 Independence Mounment 부근에 텐트를 치고 1906 년 부터 하루종일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등반로를 만들고 케뇬을 주변에 알리는데 주력하던 고독한 John Otto 에게 어느날 장대한 협곡을 화폭에 담는 예쁜 한 화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만 보면 가슴이 쿵쾅거리던 그에게 1911 년은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고  협곡에서 그림 그리던 비아트리스로 부터 결혼승인이 떨어졌다.

 

결혼식은 바로 그가 텐트를 치고 살던 Independence mounment 에서 한다.

그 이후로 이곳 지역을 사람들은 Wedding Canyon 이라고 명했다.

그는 결혼 당일 big event 로 생명 걸고 130 meter 나 되는 인디펜더스 기둥 절벽을 등반하고 성조기를 꽂고 내려온다.  

 

그 이후에 그는 미국 독립기념일에도 Independence monument 에 올라가 성조기 꽂는 이벤트를 벌이면서 수많은 성조기를 등반 루트가 개척 될 때 마다 꽂아 성조기 남자로 라는 애칭이 붙는다.

 

행복했던 결혼은 단지 두달 뿐이었다.

신부는 신혼의 단꿈은 커녕  도저히 야생의 생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뱀들이 다니고 각종 동물이 으스렁 거리는 이곳의 생활은 도회지에서 그림이나 그리던 신부에겐 악몽의 연속이었으며 점점 깊은 회의감과 살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John Otto 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아름다운 캐뇬을 화폭에 나둔채 그대로 떠나가고 말았다.

 

신부가 사라진 조그만 텐트안에서 John Otto 는 수많은 상심과 허무감을 위스키로 달래며 밤을 보냈을 껏이다.

그래도 내심 떠나간 신부가 돌아오길 기대했지만 신부에게서 몇 년 만에 돌아온 것은  딸랑 이혼장이었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존 오토는 61 세가 되던 1930 년 결국 은퇴를 결심하고 케뇬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가 정착한 곳은 North California 의 조그만 금광촌인 Yreca 였다.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금을 찾아나섰다.

결국 그는 노후에 이곳에서 약 30 Km 떨어진 Klamath River 옆에 조그만 집에서 아주 단순히 소일하며 지나다 1952 년 6 월 19 일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등진다.

그는 이곳 colorado 를 떠난 후에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그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Pauper 에 매장 되었고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1870.12.30 - 1952.6.19 이라는 태어나고 죽은날 숫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항상 무소유의 개념으로 살았던 그가 죽을 때 남긴 총재산은 불과 150 불이었다고 공동묘지 주인은 전한다고 한다.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무보수로 일하며 국립공원으로 승격이라는 일념 하나로 거의 평생을 살아온 John Otto 의 사랑이야기는 협곡을 따라 슬픈 사랑의 노래가 오늘도 애잔하게 들려오는듯 하다.

 

신부 대신에 Canyon 을 택한 John Otto 의 땀방울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그가 닦아논 길을 편하게 달리면서 사진을 찍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별빛이 되고, 바람이 되고,  햇빛이 되어 오늘도

협곡에서 장엄한 서사시를 읽는 줄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