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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캠핑카(RV) 여행/노르웨이2, Norway

아르 누보(Art Nouveau), 올레순(Alesund)_노르웨이 (Norway)4

by 세인트1 2016. 6. 5.

올레순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헤서는 노르웨이의 슬픈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할듯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알기도 바쁜데 웬 남의 나라 역사냐고 말할분도 계시겠지만

여행을 즐기는건 배경을 미리 알아놓으면 여행의 참맛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아래글은 나무위키에서 펌한 노르웨이의 역사입니다.

한때 독일군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을 청산했던 과정은 유명한 일입니다. 마치 청소하듯이 과거 청소를 자행한 뒷면에는 복수극이 숨어있었다 해도 관언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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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근대사


바이킹계 민족인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로서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872년에서야 하랄 왕[1]의해 최초로 통일국가인 노르드 왕국이 건설될 정도로 늦게 출발하였다. 9세기~11세기에 걸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빈란드[2]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1013년 잠시 덴마크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나 곧 벗어나 스웨덴, 덴마크, 한자동맹 등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후 지속되는 왕권다툼과 한자동맹에게 밀려 국력이 쇠한 와중에 국왕 호콘 6세가 사망하면서 1380년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여왕에게 왕권이 넘어가 이후 1814년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양도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2월 11일 노르웨이는 독립을 선포하나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으며 이후 동군연합으로서 준독립 상태에 놓였으며, 1905년 6월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칼 왕자를 데려와 국왕 호콘 7세로 추대하면서 전쟁의 위기에 빠지나 스웨덴이 전쟁을 포기[4]하면서 6월 7일 독립하게 되었다.


현대사

이후, 중립국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넘겼으나 1940년 4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점령해 종전시까지 독일의 점령지로서 유지되었다. 이 무렵 노르웨이의 흑역사이자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이 신정부의 수반을 자처했으나 실제로 통치력을 행사한 바는 없으며 나치가 패망하고 노르웨이 정부는 크비슬링을 총살대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어에서도 quisling(퀴즐링)은 조국의 배신자, 침략자의 앞잡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과거청산 문제

다만 이 노르웨이의 나치 문제는 알고 보면 매우 복잡해서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한민국의 친일파 문제와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바로 괴벨스로 대표되는 나치의 선전활동 때문이다. 괴벨스는 교묘하게 선전활동을 펼쳐 노르웨이인들에게 "동쪽에서 소련의 공산군이 밀고 들어온다. 나치는 노르웨이를 소련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들어왔다."라는 식으로 선전을 펼쳤다. 되도 않는 이야기같지만 바로 옆동네가 소련에게 밟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노르웨이 사람들중에 이 말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나치 독일에 점령되나 소련에 점령되나 50보 100보였지만, 영토와 국민들을 소련에 빼앗긴 핀란드와 달리 적어도 독일은 노르웨이의 영토까지 합병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은 젊은 노르웨이 인들이 상당히 많았고, 이에 자기 딴에는 진심으로 조국을 위한다고 믿으며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에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거는 비극이 벌어졌다. 조국을 향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참전하고 돌아왔더니 조국은 그들을 매국노로 낙인찍었다. 이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는, 단순히 자업자득이라는 말로만 돌리기에는 복잡한 문제다.


당시 인구가 300만이었던 노르웨이에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의 수는 10만이 넘었다. 대한민국의 현 인구수로 치면 150만이 넘는 비중이다. 여기서 십대 중반까지의 인구는 애당초 협력을 운운할 나이대가 아니니 사실상 생산력 있는 인구의 상당수가 나치에 협력했던 것이다.


거기에 노르웨이 정부는 군 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들까지 매국노로 지정하고 재판을 벌였으며, 국제 적십자사가 이를 하지 말 것을 부탁했으나 쿨하게 씹고 징역을 선고했다. 어찌보면 과잉 처벌인데, 이는 당시 노르웨이 정부의 조바심도 섞여 있었다. 영화, 소설, 역사서에는 당연히 레지스탕스 활동이 중점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은 친 나치 활동 역시 그 못지 않게, 어찌보면 그보다 더 활발했던게 2차 대전 당시의 노르웨이다. 때문에 전범국으로 몰릴까 두려웠던 노르웨이는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강하게 처벌했고, 그 와중 경계가 모호한 사람들 역시 "에이 그냥 다 처벌해 버려!"라는 방침으로 휩쓸려 묻어간 감이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생계형 친일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처벌을 내린 케이스가 상당히 많다.


그러면서 사회 분위기는 철저하게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해서만 교육하고, 나치 협력자는 무조건 나쁜 놈으로 몰아갔다. 물론 나치 협력자 중 상당수는 자기 출세를 위해서 협력한 매국노와 하등 다를바 없는 인간들이었으나, 상당수는 젊은 시절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조국을 위한다는 생각 아래 참전을 했거나 먹고 살기 위해 나치에 협력했거나 목숨을 구한다고 간호사가 되었는데 매국노 낙인을 찍어버렸으니 그 분과 한은 상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당시의 노르웨이에게 이런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딱히 대안도 없는 것이어서, 그냥 나치가 만들어 낸 비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노르웨이의 이런 나치 관련 역사 청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책이 노르웨이의 인기 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중 세 번째 책, <레드 브레스트>. 다만 이 책은 대중소설인만큼 그 깊이와 객관적 현실의 묘사 면에서는 조금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네스뵈의 아버지는 나치 협력자인만큼 조금은 그 사람들의 편에서 치중되어 소설이 쓰여졌을 가능성도 감수하고 봐야 한다. 물론 네스뵈의 어머니는 레지스탕스라는(…) 사실도 유념하고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책이 노르웨이의 현실을 왜곡하고 매국노 집단에게만 유리한 책이라면 아직까지 네스뵈가 노르웨이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대중소설가로 군림하고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그 내용의 민감함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서 노르웨이인들 중 극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종종 있다.



 2차대전 이후


해방 이후 중립 정책을 포기하면서 냉전기엔 NATO 북부전선의 주역이었다. 피요르드 협만 안으로 나토 항모기동부대가 들어가 북부 러시아를 두들기는 훈련도 많이 했다. 노르웨이 해군의 미사일고속정이나 206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한 잠수함 전력도 약소국치고는 나름대로 충실한 편이었다.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폭풍>에서 키로프급 순양함을 날려버린 것도 노르웨이 해군의 206급 잠수함. 주위의 스웨덴과 핀란드가 실제 중립국이었단 걸 생각하면 흠좀무.


1969년에 북해에서 처음 석유가 발견된 뒤 1973년 국영석유회사 스타토일을 설립하였다. 이후 상당수의 주민들이 어부에서 석유 관련 기술자로 전향했다


데인족

유틀란트 반도

이 파트를 보는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덴마크 역사란에 기록된 하랄 왕과는 당연히 다른 인물로, 이쪽은 '미발왕( Fairhair)' 하랄이라는 왕으로 유명한 잉링 가의 핏줄이고, 덴마크의 하랄은 훨씬 더 유명한 하랄 블루투스(푸른 이빨의 왕)다.

이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아이슬란드 뿐이다. 그린란드와 빈란드는 원주민과의 충돌과 환경부적응 등으로 상실. 현재의 그린란드는 덴마크가 재개척한 곳이다.


호콘 7세는 스웨덴 국왕 칼 15세의 외손자이다. 그러니 전쟁을 포기할 수 밖에. 만약 스웨덴 왕실의 피가 섞이지 않은 다른 덴마크 왕족을 노르웨이의 왕으로 추대하거나 공화정으로 독립하려 했다면 스웨덴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지도

이때도 중립을 지키려 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우리 편 안 들면 늬들도 적."이라고 하는 바람에 노르웨이 주재 영국대사가 우릴 나치 편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냐고 흥분한 적도 있다. 그나마 나치가 먼저 노르웨이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노르웨이 망명자들은 영국 편을 들게 된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고 하지만 노르웨이군도 열악한 무장으로 저항하여 나치군 순양함이 격침당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점령 이후 전사자 추모비를 노르웨이에 설치했을 정도로 나치로선 굴욕이었다. 물론 노르웨이 정부가 나중에 깨끗하게 부숴버렸다.

 한국에서 이완용이 가진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노르웨이의 입장에서는 이완용이 한국의 비드쿤 크비슬링일 듯

노르웨이는 겨울전쟁에 있어 핀란드를 진심으로 지원했다. 725명이 자발적으로 핀란드 편에 참전했으며 70명의 의료단을 파견했다. 또, 국민적인 성금(200만 크로네 - 이는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많은 성금이었다)을 모아서 6대의 비행기를 사서 보냈으며, 몰래 75mm 독일제 야포 12문과 12000발의 포탄까지 보낼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걸로도 모자라 소총을 모으고(비록 19세기에 나온 크라그 요르겐센 소총이지만) 5만개의 보급품이 담긴 가방도 보냈으며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그리드 운세트는 자신의 노벨상 메달까지 핀란드에 바쳤다. 핀란드가 침략당하는게 남의 일 같지 않아서겠지만 이런 일을 겪었으니 소련에 대한 경계심이 크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