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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꼭가봐야할 자연절경,유산/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자연절경,유산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자연절경 56, National Historic Site (일본인 강제 수용소)

by 세인트1 2014. 10. 25.

만자나 국립 사적 보호지역.



이곳은 3번이나 스쳐간꿑에 성공한 곳입니다.

첫번째는 미국 예산 절감으로 모든 국립 공원이 폐쇄되었을때,

두번짼 졸다가 지나친것도 모르고 마냥 내려가는 바람에,

세번째는 무슨 이유인지 문이 꼭꼭 잠겨있었습니다.


레이크 모노에서 데쓰밸리로 가는길에 395번 옛 프리웨이 선상에 있는 이곳은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프리웨이와 경계하는 이곳은 잠시 들려서 두어시간 감상하면 끝낼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미국 생활을 엿볼수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남겨져 있는곳입니다.



아래는 펌글입니다.


만자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 거주하던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하 일본인)들이 집단 수용된 강제수용소 10곳 중 하나이다. 


그곳은 1평방마일(약 783,470평) 정도의 휑한 빈 공터에 작은 기념관이 하 나 있을 뿐 동쪽으로는 데스밸리가 그리고 서쪽으로는 미국 본토에서 제일 높다는 휘트니 산이 위치해 있다.


별 기대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 다 음과 같은 글이 방문객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집단 이주시키지 았어야 했다. 그것은 미국적이지 않고 헌법 에도 위배되는 것이며 기독교인답지도 않 은 것이었다(It was un-American, unconstitutional, un-Christian).” 

이 글을 읽는 순간 문득 호기심이 생겼 다. 

무엇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저런 고백을 하게 만든 것일까? 


만자나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 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에 살고 있던 12만 일본인들 의 삶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진주만 공 격은 생전 공격받은 적이 없던 미국인들에 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따라서 당시 미국 내 에서는 인종차별적 편견이 극대화되었으며 향후 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인들의 스파이 행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기간 자국에 위협이 될 경우 군사지역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공표하 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서부 해안가에 거주하던 모든 일본인들은 재산 처분 등 주변 정리를 

하기도 전에, 10 군데의 급조된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은 사막이나 평원, 늪지 등 거주하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만자나 역시 사막과 산맥 사이의, 모래 먼지가 끊임없이 날아오는 지역으로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가 여름 에는 화씨 110도까지 올라가는 사막지대 이다. 집단수용 초기 만자나에는 한때 긴장감 이 고조되기도 했는데 1942년 말 발생한 소요사태에서 일본인 2명이 사망하고 10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1943년에는 미국 이 일본인들에게 충성심을 묻는 질문사항에 답할 것을 요구하면서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제2차 세계대 전 참전여부에 대한 질문사항에 거부했지만 서약을 한 일부 사람들은 강제수용소를 떠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자원자건 징집자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442부대’에 배치되어 북부아프리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파견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만자나에 수용된 일본인의 2/3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였고 나머지도 미국에 서 10년이상 살았지만 시민권이 거부된 사람들이었다. 일본인들이 만자나에서 거주한 기간은 대략 3년 반 정도였으며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미국 정부가 이전의 보금자리 로 되돌려 보내주었고 직접 일자리까지 알선해 주었다. 척박한 데스밸리를 지나면서 당시 일본 인들이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십분 이해되었다. 


하지만 기념관 내의 사진 속 일 본인들의 표정은 점차 그곳의 생활을 즐기 는 듯 밝아 보였으며 나름대로 그곳에서 사 교생활과 복지를 누리는 듯 했다. 그곳에 전시된 사진 속 일본인들은 1940 년대 미국의 수준 높은 생활에 맞게 미용 실에서 잡지를 보며 여유롭게 파머를 하고 야구 등 운동경기를 하며 댄스 장에서 댄스를 즐기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1988년 미국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집단수용소에 이송된 모든 일본인에게 일인당 2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당시의 상황도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