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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갈곳은 많다.

50대 중반의 아줌마들이 도전한 세계여행

by 세인트1 2014. 11. 23.


아마 누구나 꿈꾸지 않을까. 

세계여행 말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진 않다. 좋은 건 분명 아는데, 뭐랄까. 

마치 어린아이가 ‘대통령이 꿈!’이라고 외칠 때의 기분이랄까. ‘좋긴 좋지….’(한숨) 특히 주부들에겐 더 그렇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배부른 소리일 뿐. 그 ‘배부른 소리’를 세 명의 주부에게서 직접 들어봤다. 

그랬더니 큰일 났다. 어린아이처럼 다시 꿈꾸게 됐다! 

19개월간 50여 개국 여행한 오현숙 주부 

처자식 두고 떠난 비정한 엄마?!


이때다 싶었다. 

성년이 된 아들은 군대에 보냈고, 만화를 전공하던 딸은 일본 유학길에 올렸다. 

오현숙(55) 씨는 싱글맘.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나니 혈혈단신이었다. 

오 씨는 오랜 꿈을 실현하기로 했다. 


8년간 꾸렸던 자그마한 사업은 미리부터 정리해뒀다. 

화재 감시 시스템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녹록지 않았다. 하루 세끼 먹기가 힘들 정도로. 

그는 “어차피 은퇴할 것, 빨리 하고 싶은 것 하자 싶었다”고 했다. 2008년, 당시 48살이던 그는 “왜 남들 안 하는 짓을 하며 살려고 하느냐”는 친구의 핀잔(?)을 뒤로한 채, 그렇게 떠났다.


“아들이 군에 있는 동안만 여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입대와 함께 떠나, 제대하기 한 달 전에 들어오는 일정이었어요.” 


‘50살 전엔 꼭 세계여행을 하겠다’고 늘 마음먹었던 터라, 준비엔 더딤이 없었다. 살던집을 세놓고, 짐은 친정에 갖다놨다. 

친정집엔 방 한 칸을 비워달라고 해놓고 아들이 휴가 나오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준비는 이게 끝.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게 맘에 걸렸지만 대수는 아니었다. 계획도 따로 안 짰다. 

일단 시작 지역인 중국에 간 다음, 두 번째 지역을 결정하자는 식이었다. 

그렇게 중국을 시작으로 인도, 유럽, 북미, 남미, 아프리카 등 19개월 동안 50개국을 여행했다.

여행 경비는 2천8백만원이 들었다. “한 달에 1백50만원 정도 쓴 셈이죠. 한국에서의 한 달 생활비와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생활비 충당은 매달 (세놓은 집의) 임대료로 했습니다.” 


여행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오 씨는 “7대 불가사의를 모두 봤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친절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특히 예멘에서의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길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버스를 잡아주고 꼭 버스비를 내주더라고요. 한화로 2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돈이지만, 베푸는 것이 몸에 밴 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집 생각이 간절할 때도 있었다. “아프리카는 치안이 안 좋잖아요. 케냐 나이로비에서 탄자니아로 가려고 하는데 하필 차편이 새벽 5시 편밖에 없는 겁니다. 숙소에서 정류장까지 100m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거길 걷는 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어요.” 심지어 에티오피아에서 케냐로 올 때는 소 떼를 실은 트럭을 타고 왔단다. 그야말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고 27시간 동안. 이뿐만 아니라 빈대 탓에 잠을 설친 것도 부지기수. 


‘생고생’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건 ‘꿈꾸던 일’로 남겨두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어서였다. “여행지가 바뀔 때마다 군에 있는 아들에게 엽서를 보냈어요. 그게 60장이 넘죠. 중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지금도 그래요. ‘엄마는 선구자’라고요.” 


55살인 그는 또 다른 여행을 계획 중이다. “친구 둘과 2년 넘게 매달 10만원씩 계를 들고 있어요. 친구의 아이들이 지금 고등학생인데 애들 대학교 가면 남미를 다시 한 번 갈까 생각 중입니다. 1년 반쯤 더 부으면 각자 400만원에서 500만원쯤 모이겠죠?” 


작지만 다부진 체구. 왠지 오래전부터 여행을 즐겼을 것 같았다. 한데 38살 이전엔 비행기 한번 못 타봤단다. “먹고 살기 바빴죠. 혼자 애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요. 간신히 숨 돌릴 때가 됐을 때 동생과 뉴질랜드에 갔던 게 평생 첫 해외여행이었어요.” 오 씨는 세계여행을 꿈꾸는 아줌마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초행길이 낯선 건 국내든 해외든 마찬가지”라면서 “가까운 곳에라도 한 번 다녀오면 이후부터는 용기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기복이 심한 이삼십 대를 보냈습니다. 정말 일만 했죠.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 여유를 조금 찾고 나니 삶에 전환이 필요하다 느꼈어요. 바쁘게 살았던 지난날에 종지부를 찍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남편 권기혁 씨는 10년간 운영하던 사업을 동생에게 넘겼다. 마침 아내 최선영 씨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차였다.

선영 씨는 “(둘 사이) 아이가 없어 일에만 매달렸다”면서 “출산, 직장 등의 과제에서 벗어날 계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기혁 씨는 아내에게 “40대를 맞이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갖자”고 했고, 선영 씨는 “세계여행이 좋겠다”고 했다. 일사천리였다. 부부는 그길로 세계지도를 샀다. “막상 지도를 샀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꿈꾸듯이 얘길 나눴어요. 여기저기 짚으면서 여기 가서 뭐 먹자, 저기 가서 자전거를 타자, 이런 식으로요.”


여행 계획도 구체적으로 짜지 않았다. 다만 세 가지 원칙만 세웠다. 친구 많이 사귀기, 액티비티(등산, 골프, 스킨스쿠버)는 최대한 함께하기, 그 지역의 역사는 알고 오기. 그리고 세계를 어느 방향으로 돌지 정하고, 무작정 떠났다. “준비기간은 3개월도 안 됐어요. 살던 전셋집을 빼고 차를 파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죠.”


결혼 11년 차 부부는 그렇게 2010년 10월부터 1년여간(370일)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면서 전셋집과 차를 판 대가, 그 이상의 것을 얻었다.


“페루의 안나푸르나를 트래킹하면서 나귀에 텐트와 짐을 실은 채 아내와 산을 넘었던 기억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워낙 높아(5,400m) 고산증을 겪기도 했지만요.” 선영 씨가 말을 거들었다.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남미 ‘우수아이아’라는 곳에 갔을 때는 그곳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한국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죠.” 선영 씨는 이어 “칼레파테 빙하, 이구아수 폭포, 히말라야 만년설 등의 경이로운 자연은 인간의 세계가 아닌 우주 그 자체였다”면서 “말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아찔한 기억도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지진을 만나기도 했고, 날짜변경선을 계산 못 하고 예약한 탓에 뉴질랜드에서 아르헨티나로 갔을 땐 노숙할 뻔도 했다. 고난이 따랐지만, 다툼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 직장생활로 바쁘게 살 때가 더 그랬다.


“떠나기 전 역할 분담(?)을 철저히 한 덕이에요. ‘리더십’과 ‘팔로우십’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숙소에 관한 한 여자들이 까다로우니까 여행지, 숙소 등 주요 사안은 아내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저는 콘텐츠, 예를 들면 현지인들의 생활, 지역별 역사적 배경, 여행객 등 사람에 대해 미리 파악하는 걸 책임졌죠.”


돌아오고 나서 부부 사이는 확실히 좋아졌다. “어떤 부분이 좋아졌는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힘들어요. 좋은 친구가 하나 더 생긴 느낌이라면 설명이 되려나요.”


총 경비는 둘이 합쳐 5천만원가량 들었다. 당초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귀국하고 나서의 정착 비용은 따로 떼어놨다.

여행을 마친 지 3년이 지난 현재 부부는 둘 다 사회로 복귀했다. 기혁 씨는 “가사분담이나 회식 문제로 가끔 투덕거리긴 하지만, 주말 여가시간에 함께 등산을 하고 영화를 보며 알콩달콩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부의 세계여행. 이보다 낭만적인 게 또 있을까 싶지만, 말처럼 행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아이들이 있다면 양육 문제가 걸리고, 돌아오면 사회복귀에 대한 걱정도 만만찮다.

기혁 씨는 “힘든 결정이 뒤따라야 하기에 무작정 도전해보라고는 못 하겠다”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주제넘는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리는 손아귀에 있는 것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딱 그만큼만을 내 것으로 만들죠. 만일 그걸 놓는다면요? 더 큰 품으로 안을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7년간 세계일주 한, 이민자·정수인 모녀  

40대 엄마와 10대 딸의 성장 여행


하이델베르크에서 이민자(사진 오른쪽)씨와 정수인 양.

  하이델베르크에서 이민자(사진 오른쪽)씨와 정수인 양.

깜짝 놀랐다. 장장 7년간 미성년인 딸과 함께 세계여행을 했다기에. 가장 먼저 궁금했던 점. “아니, 그럼 딸아이 학교는요?” 이민자(50) 씨가 답했다. “아, 방학 때마다 틈틈이 간 거예요.” 왠지(?) 김이 조금 빠지는가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싶었다. 14번의 방학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딸과 여행을 했다는 이 씨. 그는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 (딸에게) 물려줄까 고민하다가 함께 세계여행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2007년 시작한 여행은 올해 초까지 이어졌다. “2007년은 딸이 4학년이 되던 해예요. 그때가 좋은 시점이다 싶었어요. 딸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였고, 저도 바쁜 일상에서 벗어날 시기이기도 했고요.” 여행은 방학 때마다 7~15일씩 했다. 방학을 앞두고 모녀는 세계지도를 폈다. 그때그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그해 방학의 여행지가 됐다. 그렇게 7년 동안 16개국을 돌았다.

여행의 목적은 애초에 ‘교육’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수인(18) 양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며 창의력을 키웠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며 겸손을 배웠다. 싱가포르 팔로우빈에서는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며 인내심을 길렀다. 이 씨는 “자전거를 타고 팔로우빈 원시림의 좁은 숲을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수인 양은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 나이아가라 폭포를 둘러보며 대자연의 위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해서 ‘세상을 더욱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너무 일찍 세상을 통달한 말투로.


“여행하고 나서 딸이 많이 달라졌어요. 학교, 학원, 집을 오가며 지쳤는지 쉽게 짜증을 냈거든요. 그런데 눈빛이 달라졌어요. 여행할 때처럼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죠. 생각의 범주가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겠죠.” 


이 씨는 수인 양이 어릴 때부터 ‘경험’을 강조하며 양육했다. ‘공부하라’는 소리 대신 함께 서점에 가는 식으로. 워낙 돈독한 모녀지간이긴 했지만, 여행 후엔 서로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단다. 


“서로 대화할 기회가 많으니까요. 아무리 모녀지간이라도 타지에서 고생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하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아침 기상시간 문제나, 옷 입는 스타일 같은 걸로요. 이런 소소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결국 공감대가 넓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경지랍니다.” 이 씨는 모녀 여행지로 터키의 카파도키아를 추천했다. 그는 “화산 폭발로 인해 기이한 버섯 모양의 지형이 형성된 곳으로 열기구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아래를 보는 광경이 장관”이라고 했다.


방학 때마다 ‘기러기 아빠’가 되는 남편의 반대는 없었을까. “눈총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재밌게 놀다 온나’라고 말해주곤 했죠. 남편의 지지가 없었다면 아무래도 힘들었을 거예요.”


여행 경비는 틈틈이 따로 모았다. 조금씩 저금해놨다가, 방학 때 확 써버렸다. “비용을 무시할 순 없지만, 사실 여행은 돈 문제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건 여행을 해야겠다는 의지와 실천이죠.” 이 씨는 현재 진주에서 살고 있다. 수인 양은 고등학교 2학년. 내년에 고3이 되는 만큼,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씨는 딸과의 여행을 ‘강추’했다. “서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바쁜 평소의 삶에서 벗어나 좋은 기운을 많이 받게 되고, 또 다음 여행을 꿈꾸게 되죠. 누구나 여행을 꿈꾸지만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용기와 실천이 꼭 필요합니다. 월트 디즈니는 ‘꿈을 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실현할 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딸과의 여행을 꿈꾸는 엄마들은 곧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니, 발을 내디뎌보기를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