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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갈곳은 많다.

'언젠가' 는 결코 오지 않는다.

by 세인트1 2014. 11. 2.

52세 두 남자의 요트세계일주

10월 23일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윤태근 선장의 스피릿 오브 코리아(Spirit of Korea)호. 그러나 전기계통에 문제가 생겨 회항했다가 27일에야 다시 출발했다. 부산=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똑같이 1962년생, 52세 동갑내기다.

김승진 선장과 윤태근 선장. 김 선장은 10월 19일, 윤 선장은 나흘 뒤인 23일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의 단독 요트 세계일주에 나섰다. 작년 4월 중국의 궈촨(郭川·48)과 인도의 아브힐라시 토미(33)가 각각 무기항 항해에 성공해 국가적 영웅이 된 적은 있으나, 한 나라에서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도전을 시작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예상 항해 거리는 대략 2만2000해리(海里·nautical mile), 미터법으로는 4만 km쯤 된다. 7개월을 잡고 있으니 하루에 100해리를 가야 한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매일 6, 7노트로 달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항해 규정도 까다롭다. 혼자서 바람의 힘에만 의지해 요트를 조종하되 항구나 육지에 기항해서는 안 되고, 설사 응급의료라도 외부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항해 기간 내내 경도(經度)를 한쪽 방향으로만 통과해 출발지로 돌아와야 한다. 

두 사람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항해한다. 태평양∼남극해∼대서양∼인도양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바다의 에베레스트’라 불리는 칠레 최남단 혼 곶(Cape Horn) 앞바다를 통과해야 한다. 유빙(流氷)이 떠다니고, 집채만 한 파도가 달려드는 바다, 오직 죽은 자의 넋만이 건널 수 있다는 바다, 그래서 잿빛 하늘을 나는 앨버트로스 새를 가리키며 ‘뱃사람들의 환생’이라고 불렀던, 그 바다를 지나야 한다.

“안 가면 안 돼?” 경남 창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윤 선장의 부인은 출항 이틀 전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두 남자는 그렇게 바다로 떠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필자의 가슴엔 묘한 설렘이 일었다. 김승진 선장의 아라파니(ARAPANI)호가 충남 당진 왜목항을 출발할 때, 특히 그랬다.

동년배라서 그랬을까? 필자도 소띠지만, 호적상으로는 1962년생이다. 분명, 극한의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에 대한 외경(畏敬)이나 미지(未知)의 대양(大洋)에 대한 호기심과는 또 다른 그 무엇이 가슴을 덥히는 듯했다. 

“Someday will never come!”  

▼ 윤태근 선장 “30년된 퇴역요트… 나를 닮았네요” ▼

요트로 세계일주 나선 중년의 두 남자


윤태근 선장은 출항기념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지만, 재출항한 지 이틀째인 10월 28일엔 ‘우울증이 도져 배를 다시 돌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는 문자를 육상지원팀으로 보내왔다. 아래 사진은 세계일주 항로와 10월 30일 현재 윤 선장과 김승진 선장의 위치. 부산=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수많은 중년 남자들이 “언젠가는…” 하면서 마음속의 꿈을 접고 살지만 그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는다. 미국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은 ‘아, 그때 해볼걸!(It might have been!)’이라는 말”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자기 연민의 토로였을 것이다. 휘티어의 이 말을 필자는, 영화 번역으로 유명한 이미도 씨의 칼럼에서 읽었다. 그도 1961년생이었다.

1960∼1963년생은 715만 명에 이르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중에서도 주니어 세대에 속한다.

작년 봄,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보고서를 펴낸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 세대(bridging generation)’라고 불렀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모든 부양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면서도 ‘농업 세대’와 ‘IT 세대’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놓았고, 1970년대 산업화의 주력부대이면서 1980년대의 ‘운동권 세대’와 1990년대 ‘탐닉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근·현대의 가교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1인생기(사회화, 교육)와 제2인생기(직업, 의무, 소득)를 거쳐 제3인생기(개인적 성숙, 성취)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의 자화상은 소리 내 울지 않을 뿐, 슬프기 짝이 없다. 고령화 사회에서는 ‘더블(double) 30’이 아니라 ‘트리플(triple) 30’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제3인생기도 무려 30년이나 되는데, 전혀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김 선장과 윤 선장, 두 62년생의 항해는 그런 베이비부머, 아니 나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들렸다. ‘Someday will never come!’ ‘Someday will never come!’….

김 선장은 다큐멘터리 PD 출신으로 낚시가 좋아 모터보트를 미친 듯이 몰다가 요트에 입문했다. 윤 선장은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옆에 있는 해운대 소방서에서 일하다 요트의 매력에 빠졌고, ‘요트 딜리버리(운송대행)’라는 국내 최초의 직업까지 창출해냈다. 선주의 주문을 받아 일본에서 중고 요트를 바다를 통해 배달해 주는 일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2009년 10월부터 2011년 6월까지 20개월에 걸쳐 요트로 세계를 일주했다. 요트 단독 항해로는 국내 최초의 기록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항해는 취미이자 일이었다. 1956년생으로 시니어 베이비부머인 송호근 교수는 제2인생기가 ‘세상을 향한 30년 여행’이었다면, 제3인생기의 30년은 ‘나를 향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라고 충고한다. 30년 만에 나를 향해 돌아오는 나를 위해, 다름 아닌 나 자신과의 계약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아내는 벌써 오래전부터 ‘홀로 사는 법’을 강구해 왔다. 이미 당신에게서 독립했다! 그러니 당신도 독립해야 한다. 정서적, 심리적으로 말이다. 홀로 서는 법, 독립! 당신은 그것을 잊은 지 오래다. 누가 당신의 다리가 되어줄까? 바로 당신 자신이다. 홀로 선 당신, 독립한 당신 자신이다. 독립을 위한 필수 요건은 세 가지다. 죽음에 대한 성찰, 일, 그리고 취미다.”

송 교수는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같은 세대에 대한 깊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절규했다.

김 선장과 윤 선장의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 세계일주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새로운 계약일지도 모른다. 또 동시대, 동세대에 대한 연민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김 선장은 자신의 항해를 ‘희망 항해’라고 불렀다. 윤 선장은 배 이름을 ‘스피릿 오브 코리아(Spirit of Korea)’로 정했다.

윤 선장은 이런 말도 했다. “7080은 힘들 때 나라를 일으켜 세운 세대 아닙니까?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들, 아니 우리의 헌신을 모두 수포로 만들었습니다. 힘든 항해지만, 몇 번이고 할까 말까 망설인 항해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7080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윤태근 선장과 스피릿 오브 코리아




2011년 6월 국내 최초의 단독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윤태근 선장은 해마다 ‘무기항 세계일주’를 꿈꿨다.

필자는 그가 인도양, 대서양을 돌아 태평양 횡단을 남겨두고 있던 그해 2월, ‘요트로 세계일주 단독 항해 중인 윤태근 선장’이라는 제하의 위성 인터뷰 기사를 쓴 인연이 있다. 그 인연으로, 그는 가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 캐나다에서 80피트짜리 철선이 나왔는데…”라며 무기항의 꿈을 펴보이곤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생업과 항해비용이 문제였다. 그는 세계일주를 다녀온 뒤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요트 딜리버리’를 했다. 경남 통영 한산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윤태근의 요트항해학교’도 차렸다. 3박 4일의 쓰시마 일주, 9박 10일 일정의 필리핀 항해프로그램 같은 ‘수익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비용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두 달 전 김승진 선장과 통화할 때만 해도 ‘무기항 도전’의 계획은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한 달 반쯤 전에 인터넷에서 그 배를 보는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쿄로 달려갔습니다.”

1984년에 건조된 선령(船齡) 30년의 중고 요트였지만, 도쿄∼하와이 간 대양 레이스 출전을 목표로 만든 배였다. 이후 도쿄∼괌 구간 레이스에도 5번이나 참여한 관록의 배였다. 일본인 선주에게 무기항 계획을 밝히자 그는 대뜸 “Okay, no problem!(아무 문제없어!)”이라고 대답했다.

무엇보다 배 가격이 쌌다. 한국 돈으로 800만 원. 그렇게 싸지 않았다면 올해도 무기항 일주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가 있는 도쿄 마리나에 도착해서도 나는 선뜻

배로 들어가지 못했다.

배가 생각과 다르면 어떡하지….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서 밤이 되어서야 배로 들어갔다.

첫날밤을 배에서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배를 둘러봤다. 선체도 두드려보고, 덱(갑판)에 굴러도 보고…‘이보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내 나이 53세, 배의 선령이 30년. 배의 수명으로 보면 나랑 거의 같은 연배다. 

대답 없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우리 해낼 수 있겠는가?’

그때 낮지만, 단호한 대답이 내 귀에 들렸다.

‘선장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배를 만났을 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다시 무기항 세계일주용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최소 8000만 원이 필요했다. 기상 때문에 출발을 미룰 수가 없는데, 출항이 임박한 날짜에 첫째아들 결혼식까지 잡혀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윤 선장은 ‘네트워크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간신히, 어찌어찌해서 요트동호인회에서 3000만 원, 전경련에서 3000만 원을 후원받아 출항 나흘 전에야 가까스로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하려면 8000만 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새 배, 좋은 배도 아니고 30년이나 된 퇴역 요트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도전하느냐 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비용 절감을 위해 그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뚝딱 처리한다. 항해 중 최대의 난관으로 꼽히는 남극해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요트 앞뒤 쪽에 격벽을 설치해 ‘불침선’을 만들어야 한다. FRP로 된 선체라 전문업체에 맡겨야 하지만 그는 합판을 이용해 직접 시공했다. 시간도, 돈도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조악할 수밖에 없다. 그 격벽을 보는 순간, 필자의 마음까지 스산해졌다. 

그래도 그는 육상지원팀을 맡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이중식 교수가 ‘빙하 경보 시스템’을 구축해줘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고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수영만으로 내려간 이달 20일에도 윤 선장은 장비를 구입하고, 장착하고, 수리하느라 바빴다. 처음 계획한 출항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요트경기장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중에도 그는 식당 주인에게 “콩나물 재배기는 어디 가면 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기자가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으로 미리 구입하지 그랬느냐”고 하니 그는 “사실은 고등학교 1학년인 막내아들한테 ‘아빠가 콩나물 먹을 때마다 네 생각할게!’라면서 인터넷 구입을 부탁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게 좀 서운합니다”라며 웃었다.

그래도 그는 출항 직전 홈페이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루고 싶은 꿈과 하고자 하는 실천력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극한의 도전이지만, 이 험난한 여정을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하는 모든 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항해가 그분들께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김승진 선장 “우리 세대에게 희망씨앗 되고 싶어” ▼


김승진 선장과 아라파니(ARAPANI)

지난달 18일 충남 당진시 왜목마을에서 닻을 올린 김승진 선장. 그러나 김 선장의 ‘아라파니’호도 장비에 문제가 생겨 인근 전곡항에서 재정비한 뒤 19일 공식 세계일주에 나섰다. 당진=박경모 사진전문기자 momo@donga.com

누군가가 그랬다. 충남 당진 왜목항에 요트가 들어온 것은 한민족 50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서해안에서 유일하게 일출을 볼 수 있는 해변’이라는 게 그동안 왜목마을의 관광 포인트였다. 그러나 일출을 볼 수 있는 작은 해변과 횟집들만 있었지 제대로 된 부두시설 하나 없는 바닷가 마을이다.

“오늘은 증말 뜻깊은 날이여∼!” 2014년 6월 20일 김승진 선장의 아라파니호가 왜목항 입구에 들어서자 동승하고 있던 왜목 선라이즈 호텔 김종득 사장은 그렇게 말했다. 

요트를 시작한 13년 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고, 크로아티아에서 아라파니호를 사들인 4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김승진 선장의 ‘무기항 세계일주’ 프로젝트를 왜목으로 낚아챈 주인공이 바로 김 사장이다. 25년 전부터 ‘해뜨는 왜목’을 알리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김 사장은 요트를 알아보기 위해 우연히 경남 통영에 들렀다가 김 선장을 알게 됐고, 금방 ‘DNA가 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틀 뒤 바닷가에 김 선장의 무기항 프로젝트를 돕기 위한 베이스캠프가 차려졌다. 그리고 출항 계획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스물네 살 때 한강 350km를 수영으로 종주하고, 딱 사흘 쉰 뒤 바로 일본에서 제일 길다는 시나노 강 380km를 헤엄칠 만큼 김 선장의 삶은 유별난 탐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모험으로 잔뼈가 굵어졌다”고 했다. 1990년에는 5800km에 달하는 중국 양쯔 강을 탐사해 다큐물로 만들었다. 

그래도 일본 방송영상원을 졸업하고 후지TV의 외국인 1호 정사원으로 있던 30대에는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성에 차지 않았다. “30대 후반에 ‘사람은 자기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질랜드로 건너갔고, 요트에 빠졌다. 그리고 프리랜서 다큐 PD이자 해양탐험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말 그대로, 유전자가 시키는 삶이었다. 

2010년 크로아티아에서 한국까지 2만 km를 항해했고, 작년에는 카리브 해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돌아오는 2만6000km의 항해 경험도 쌓았다.

“무기항 일주 계획은 작년 9월부터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후원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김종득 사장님을 알게 되면서 왜목과 당진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김 사장님은 저한테 항해계획을 듣더니 바로 ‘그거, 우리 동네에서 해야죠∼’라며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왜목항에 들렀는데 마을 부녀회원인 김응숙 씨가 ‘한번 타 봐도 돼요?’ 하더니 자기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후원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목해맞이식당 사장님은 ‘건강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시고…. 정말 코끝이 찡했습니다. 항해만 단독이지 수백 명의 사랑을 싣고 가는 겁니다.”

박주용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부회장은 지난달 한국전력을 정년퇴임하자마자 아예 육상지원팀장을 맡았다. 앞으로 7개월 동안 베이스캠프로 사용할 바닷가 캠핑카도 박 부회장이 퇴직금을 털어 마련한 것이다. 

왜목항에서 출항식이 있던 날, 김 선장은 “박 부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오늘 출발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정말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여하튼 김 선장은 ‘단독(Solo), 무기항(Nonstop), 무원조(Unassisted), 무동력(Power restriction) 요트 세계일주’에 도전하는 국내 최초가 됐다. 

당진과 왜목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뜻밖의 사랑’ 때문일까. 그는 가급적 기록경쟁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했다. 한국기록원에는 기록인정 신청을 해뒀지만, 국제기구에는 아예 그조차 하지 않았다. 돈도 1300만 원이나 들 뿐 아니라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육상지원팀에 항해 도중 윤 선장의 위치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해뒀다.

“서두르진 않을 겁니다. 당장 사이판쯤 가면 태풍을 만나게 될 텐데 자연을 거스를 순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케이프혼(칠레 남단)은 ‘요트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하늘이 길을 열어주느냐에 성공의 절반이 달려 있습니다. 다만 제 항해가 당진과 왜목마을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세월호 참사로 슬픔에 빠져 있는 국민들께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배 이름도 아라(바다)와 ㅱ파니(달팽이의 옛말)를 합쳐서 ‘아라파니’라고 했고, 항해도 ‘희망항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선의의 기록경쟁조차 마다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누가 먼저 들어오든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완주에 성공하면 한국 해양사는 새로운 장(章)을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역사보다, 왜목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 바다달팽이(아라파니)처럼 천천히 가는 한이 있더라도….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