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약 4개월전 지나다 들린 기억이있다,
하지만 무슨 여유인지 문을 닫은 상황,,,
그때문에 발길을 뒤로했던 기억,,
사실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과연 이곳이 무슨 으미가 있는곳인지 전혀 알지못했고,
별로 그리 커다란 호기심도 많지않았다.
하지만 고속도로 옆에 위치한 까닭에
힘안들이고 국립 준공원을 하나 찾은 횡재같은 기분,,,
이번엔 일부로 들렸다.
데쓰밸리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시간이 어중간한 상황에서 이곳을 방문하여 자세하게 들여다볼수있는 기회는 해운이었다.
1972년 주립 역사 보호 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일본인의 화와이 공습이후
일본인을 잠재적 적군으로 분류하여 강제 수용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후 그들을 석방하고 돌아가라면서 준 돈은 일인당 $25.
그러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생존자들에게 정식 사과하고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다.
아직도 뻔뻔하게 나오는 지금의 일본인들은 도대체 뭣을 배우고
자손들에게 뭣을 가르치는지 의문이다.
아니,
그들은 자식들에게 오리발 내미는걸 가르치고,
외부에서 배우는건 사과받는것만 배우는것 같다,,
사과는 할지도 모르면서,,
이곳에는
죽은 고인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있다.
난 그것을 사진에 담지않았다.
혹시나 그 위령비가 나도모르게 사진에 들어갔을까봐
사진 검열을 특별히 신경썼을뿐이다.
이곳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이하 일본인)들을 강제로 수용했던 '만자나 전쟁수용소 사적지'다. 일본의 항복으로 인한 2차 대전의 종전은 곧 우리나라의 광복으로 이어지는 사건이기에 한국인들에겐 감정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한번 쯤은 들러봐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1941년 12월 7일 감행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이 시작되고 이로써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12만명의 일본인들의 생활은 급격히 바뀌게 된다.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서 일본인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이는 곧 정부와 군대 언론 등지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의 잠재적 파업과 스파이활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듬해 1942년 군사지역을 설정하고 이 지역내에서의 전쟁방해 행위를 근절하도록 하는 '특별법 9066' 에 서명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부는 미서부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에게 단 며칠간의 여유를 주고 그들의 집 농장 사업체 등 모든 재산을 정리하도록 했고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팔거나 이웃들에게 빌려주거나 친구들 혹은 종교단체에게 넘기기도 했다.
각 가족마다 번호가 부여돼 차량 버스 트럭 기차 등지에 실려 군인들의 감시아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주의 17개 임시 집합소로 모였다가 거기서 다시 사막이나 황무지 등에 급조된 10개의 '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로 실려 간다.
그해 11월에 되어서야 서부에 살던 일본인들의 수용작업이 마무리되었고 이후 황무지에 세워진 집단 수용소에서 비참하고 억울한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한편 진주만 침공당시 미군에는 약 5000여명의 일본인들이 미군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으나 군 당국은 즉시 이들을 '잠재적 적군'(enemy aliens)으로 간주하고 수용소에 수용한다.
1944년 1월에 들어서야 다시 이들의 복귀가 시작되었고 이 때 일본계 시민권자 '니세이(Nesei.二世)'들은 "이럴수록 진정한 미국 시민임을 보여주겠다"며 참전을 자원하여 이들로만 구성된 442연대가 창설돼 북아프리카 프랑스 이태리등지의 최전선에 투입된다. 이들은 시원찮은 무기와 보급 일본군으로 착각한 연합군의 사격에 시달리면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며 큰 전공을 세운다.
바로 이 부대들 중의 하나를 이끌었던 이가 몇 년전 LA에서 작고한 고 김영옥 대령이다. 당시 그는 442연대 100대대의 작전장교(당시 대위)로서 이들을 이끌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만자나 수용소가 들어선 이곳은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약 1만년 전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하여 약 1500년 전부터는 오웬스 밸리의 파이우트(Paiute)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수렵과 농사를 지었던 곳이다.
1910년에 이르러 이곳에는 사과 배 복숭아 등의 과수원들이 들어서 타운을 에워쌀 정도로 번성하게 되자 스패니시로 '사과 과수원'라는 만자나(Manzanar)로 불리게 된다.
1972년에 캘리포니아주의 사적지 지정을 시작으로 각종 국가 사적으로 등재된다. 1988년에는 미국 시민 자유법이 제정되어 전쟁 당시 수용됐던 이들에게 2만 달러씩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살아 남은 8만 2000명의 일본인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시에라 네바다의 살풍경을 배경으로 선 이곳은 현대사의 그늘진 또 하나의 단면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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