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꿈꿀만한 인생,,
나도 그 사람들중 하나입니다.
지독히도 목메달았던 젊은 시절에 이 사람 음악에 환장할 정도로 빠진적 있었는데
그게 거짓이었나 봅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어느순간에 다 잊혀졌더라구요.
그리곤 요즘,,
먼일인지 또다시 이사람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순간에 잊혀지겠지만 그때까진 열심히 아껴볼랍니다.
캬라얀의 실황 연주중에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고,
그 사람의 황금시기,,
영혼을 몽땅 뺏긴듯한 모습의 연주,,
이 실황을 보노라면 저까지 그냥 빠져들어갑니다.
어떻게하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빠져들수 있을까 싶네요.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라얀의 먼 조상은 그리스 출신이다. 1767년 카라얀의 5대조 게오르크 카라야니스가 그리스에서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작센에 정착했다. 작센에 정착한 카라얀의 선조들은 이후 상업, 의료 계통에 종사하면서 귀족의 칭호까지 얻어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von(폰)이 붙이게 되었다. 카라얀의 아버지 Ernst von Karajan는 잘츠부르크의 의사였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수준급의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가였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카라얀의 본명은 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귀족의 특권도 폐지되며 귀족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카라얀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는 호적(?)에서 사라졌으며, 이때 퍼스트 네임도 Heribert Ritter에서 Herbert로 바꾸었다. 1984년 11월 내한했던 카라얀의 여권에는 Herbert Karajan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성 앞에 von을 계속 사용한 것은 예술가로서 일종의 예명으로 사용된 것이다.[10]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용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실제 콘서트를 위한 카라얀의 악기는 주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 카라얀은 1948년말부터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는데, 곧 푸르트벵글러에 의해 빈 필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빈에서의 활동은 빈 심포니로 집중되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빈 필과 카라얀의 빈 심포니의 경쟁은 빈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1950년 카라얀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독일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이웃 독일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의 지원도 받은 투어였다. 그러나 음반 녹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 당시 빈 심포니의 기량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빈 심포니의 해외 공연 리뷰를 보아도 연주력에 대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적잖은 청중들이 빈 필의 공연으로 잘못 알고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카라얀은 1950년대 초중반 동안 빈 심포니의 사실상의 수장이었지만 정식 직책에 취임하지는 않았다.[24]
1989년 4월 24일 마침내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했다. 카라얀의 1970년대의 디스크 발병 이후로 쇠약해진 몸이 더이상은 지휘를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그는 베를린 필과의 계약에 따라 연간 2번씩 6회, 즉 12번의 공연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삼임하기 직전 시즌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주 스케줄을 취소했고 계약상 명시된 6회를 간신히 넘긴 7회만을 지휘했다. 일부 사람들은 카라얀이 아직도 베를린 필 및 베를린 주 정부와 기싸움을 하느라 건강을 이유로 스케줄을 취소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한 데는 당시 새로 사민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된 베를린시와 불편한 관계도 한몫 했다. 사민당 정권은 전체 공연 스케줄의 3/4 이상을 베를린 밖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베를린' 필하모닉이냐면서 비판했다. 이에 카라얀이 사민당이 지배하는 주 정부에 대해 일종의 승부수로 사직서를 던졌는데 뜻밖에 베를린 주 정부에서 사표를 수리(!)해버린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정말 몸이 쇠약해지고 베를린 필로부터 마음이 떠나서 사임했던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직후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잘츠부르크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왔지만 카라얀은 끝내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하기 전 베를린 필은 수년전부터 추진해오던 이스라엘 순회공연 계획을 세웠는데 그 일정이 1990년 4월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때문에 4월에는 해외로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이 일부로 카라얀 없이 가려고 4월로 일정을 잡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카라얀도 이에 대응하여 1990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호스트 오케스트라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로 교체하려 했다. 카라얀이 1년만 더 오래 살았으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될 뻔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사표를 던진 직후인 4월 23일 카라얀의 마지막 녹음이 되어버린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실황이 녹음되었다. 1982년의 말러 교향곡 9번 녹음과 함께 상당히 예외적으로 실황으로 녹음된 음반이었다. 빈 필 단원들의 회상에 따르면 원래는 실황이 아니라 평소와 같이 연주회 전 리허설 때 녹음이 진행될 계획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라얀이 리허설 때 녹음을 진행하지 않더니 그냥 연주회를 라이브로 녹음해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고 한다. 이날 연주회는 정기연주회가 아닌 악우협회 주최 음악회라 재연없이 단 한번의 공연만 진행되었다. 이틀 후인 4월 25일,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 사임이 언론에 공식 발표되었다.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의 자격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 중[39]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이 때 그의 자택에는 부인 엘리에트는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와 씻던 중이고 그는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소니뮤직에서의 음반 발매와 아니프에 세워진 CD 공장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부터 좋지 않던 심장을 걱정한 주치의 발터 지몬이 심전도계를 가지고 왔음에도 중국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이게 화근이 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 충격으로 얼마 후 오가도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며칠 후 자택이 있는 아니프 인근 성당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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