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립문명; 크메르 문명
건립연대; 12세기 후반
건립자; 수리야바르만 2세
발굴자; 앙리 무오
현재 소재지; 캄보디아의 톤레사프 호수 북쪽
밀림 속에서 잠들어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 유적
앙코르와트
앙코르와트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보디아에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유적은 톤레사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앙코르 산(언덕)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많은 사원 유적과 왕도였던 앙코르톰 유적도 있어서 이 지역 전체 유적을 앙코르 유적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정글에 묻혀 있던 앙코르와트를 처음 학술적으로 조사했던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박물학자인 앙리 무오였다. 그는 1860년 1월에 현지를 방문한 후 열병에 걸려 그 다음해인 1861년 10월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사후 잡지에 게재된 조사 일지는 유럽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1863년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프랑스로 건너가 조사·전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의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앙코르와트에 대한 수수께끼는 한층 더 깊어지게 되었다.
1860년대 당시, 현지인들은 크메르 문화의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앙코르와트를 누가 건설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유적의 존재마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캄보디아의 역사 자료는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앙코르와트 건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유적지과 함께 서 있는 비문에 새겨진 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비문마저도 해독이 대단히 어려워서, 그 내용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1930년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 때문에 비문이 해독되기 이전에는 앙코르와트의 건설자로 로마인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가했던 그리스인의 후예 등이 거론되었고, 심지어는 마야나 아스텍 문명설마저 주장하는 학자도 나타났다.
그러나 비문이 해독됨으로써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왕조가 건설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나아가 그 외의 유적을 포괄하는 크메르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힌두교가 탄생시킨 독특한 건축물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어로 왕성(앙코르)와 사원(와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왕도의 핵심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외형적으로는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대단히 잘 정비된 장방형 건축물로, 유적의 외부는 폭 190미터에 이르는 해자(垓字 : 성 주위로 물길을 내서 두른 물웅덩이. 주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로 건설했다-옮긴이)가 둘러쳐져 있다.
내부는 중앙에 있는 제사당을 회랑이 3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며, 제사당은 모두 다섯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탑은 높이가 65미터에 이른다. 3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회랑의 한쪽 면에는 힌두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한 부조가 새겨져 있지만, 인도 유적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부조와는 크게 다른 크메르만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앙코르와트는 종교 건축물이며, 그 구조도 힌두교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제사당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탑은 성스러운 산인 메루를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외형은 연꽃의 꽃봉우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제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은 대지와 산맥을 뜻하며, 바깥쪽의 해자는 바다를 암시한다.
결국 앙코르와트는 '세계' 그 자체를 표현한 사원이며, 동시에 왕권을 나타내는 기념물인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붉은 흙으로 기초를 다진 다음 그 위에 사암을 여러 겹으로 높이 쌓았는데, 붉은 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해자를 만들면서 나온 흙), 사암은 태국에서 수로를 통해 들여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다른 유적들이 모두 동향인 반면 앙코르와트는 서쪽을 향해 서 있다.
반란, 전쟁, 방치된 유적
크메르 왕조는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12세기가 최전성기였지만 이후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캄보디아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는데,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톤레사프 호수는 우기가 되면 홍수를 일으키고, 건기가 되면 호수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가뭄이 들었다(건기에는 호수 면적이 우기의 3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 때문에 크메르의 지배자들은 많은 저수지와 수로를 건설해서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사 외에도 수리시설을 유지하는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삶은 피폐해지고 마침내 지배자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사로 징발된 농민들은 수리아바르만 2세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크메르 왕조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그후 왕권 쟁탈전이 벌어져 왕조는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레이 계통의 참파 국이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왔다. 이리하여 1177년, 마침내 크메르는 침략자들에게 점령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후 수리야바르만 2세의 후예인 쟈야바르만 4세가 크메르의 재건을 꾀했지만('앙코르톰'편 참조), 그의 사후에는 줄곧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1431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가 크메르를 점령함으로써 크메르 왕국은 몰락하고, 그 다음해부터 이 위대한 유적은 방치되고 말았다.
소승불교로의 전환
불교도였던 쟈야바르만 4세는 이전의 힌두교를 버리고 소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왕도 앙코르에서 힌두교는 사라지게 되었고, 1432년부터 버려진 도시가 되었던 앙코르와트는 소승불교 사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앙코르와트 서쪽에는 프레아 포안(千體佛)이라 불리는 불상만을 모신 회랑이 존재한다.
앙코르와트의 존재는 중국과 일본 등에 간간이 알려지기도 했으나 19세기에 앙리 무오에 의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 이후 수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와 일본의 조사단이 유적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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