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Wat)의 도시(Angkor)'라는 의미를 가진 이 거대한 사원은 '분열의 시기'에 마침표를 찍고 등장한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1113-1150)의 사후 세계를 위한 사원으로 건축되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세운 왕의 치세는 지칠 줄 모르는 대외 원정과 수많은 사원 건설이 특징이다. 배후의 쯔엉 썬 산맥을 넘든가 수백 척의 함선을 동원해 베트남을 수시로 공격했다.
참파도 당연히 희생물이었으며 서쪽으로 버마와 말레이 지역도 캄보디아 군대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수립되었다. 송대 중국에서 맞은 캄보디아의 사절들 중 하나는 그가 보낸 것이었다(Coedes 1968 : 162). 군사적 · 정치적 성취와 더불어 사원들이 줄곧 세워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이런 행위들의 최종적 결정체였으며 그는 이 건축물에 자신의 위대한 시대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앙코르와트로부터 우리는 당시 캄보디아의 인력 동원 능력, 종교적 성향 및 열정, 국부(國富), 예술 수준, 우주관, 도시의 구획 방식 등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내부에 약 1.5㎞에 이르는 긴 회랑을 따라 정교한 부조를 새겨 놓음으로써 당시의 전쟁, 군사 기술, 크메르인은 물론 각 민족(참파, 타이인 등)의 복식 및 외향, 무기, 동식물 등에 대한 매우 방대한 자료를 인류에게 남겨 주었다. 예를 들면, 그의 모습임이 분명한 캄보디아 왕 및 그 앞에 모여 있는 신하들의 부조도 백 마디의 글보다 왕과 신속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1차 사료이다.
앙코르와트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210㏊(약 650,000평)이다. 지상을 상징하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총 길이는 5.5㎞이며, 이는 다시 폭이 약 200m인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해자는 힌두적 우주관의 관점에서 볼 때 대양(大洋)을 상징한다. 사원의 중앙에는 총 다섯 개의 탑이 있다. 그중에서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은 높이가 65m이다(Rooney 1997 : 129-130). 건축에 약 30년 걸렸다는 이 사원은 쿨렌산에서 운반해 온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중앙의 다섯 개 탑과 사원을 둘러싼 벽의 네 모서리에 있는 네 개의 탑은 전부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하니(Hall 1955 : 105) 그 장관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중앙의 탑 안에는 수리야바르만의 경배 대상이며 장차 자신이 죽은 뒤에 합일할 신으로 비슈누신이 서쪽을 향한 채 모셔져, 앞이마에 박힌 에메랄드 보석이 석양을 반사해 눈부신 빛을 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캄보디아 사회에 많이 퍼져 있던 불교의 흔적도 있는데, 1,000개의 불상을 모신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종교 건축물들이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앙코르와트는 정반대로 서쪽을 향해 있다.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유를 소개해 왔다. 즉, 왕이 힌두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바라보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좀더 낭만적인 설명은 앙코르와트에서 맞을 수 있는 석양의 노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그 방향을 택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전자에 비해서 후자가 훨씬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힌두신은 물론이고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까지 동남아시아에서 볼 때 서쪽에서 들어오지 않은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원이나 교회를 서쪽을 향해 짓는 경우는 없었다. 실제로 앙코르와트 중앙탑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황홀하다. 그러나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에 대한 수리야바르만 2세의 취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 거대한 종교 건축물을 관례를 뒤엎고 서쪽으로 향해 건설하게 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는 수리야바르만 2세가 파천황의 발상을 했다는 것은 자신감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전통 신앙과 더불어 힌두교와 불교를 수백 년간 경험하면서 자신들 고유의 신앙 체계를 확립해 온 크메르인들의 종교적 자신감이 새로운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왕권의 강화이다. 유사 이래 최대의 사원 - 자신과 합일하는 신을 모신 - 을 건설한 인물이라면 그에 상응한 왕권이 뒷받침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에 와서 왕권이 곧 신권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 이르렀다면 왕이 바라보고 싶은 곳이 곧 신이 바라는 곳이었으니 관례를 깨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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