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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좋은 여행 상식

갑자기 사라진 아나사지인

by 세인트1 2015. 1. 24.

1. 서론

 

  아나사지(Anasazi) 인들은 800~1600 CE에 미국 남서부의 콜로라도 고원과 리오 그란데 북부에서 살았던 선사시대 농경 민족이었다. ‘아나사지’라는 이름은 초기 고고학자들이 나바호어로 된 이름을 영어화한 것으로, ‘옛 사람들’이란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전에 이곳에 살다가 떠난 사람들’이 된다.1)

  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메사 베르데, 차코 캐년 등지에 남아 있는 웅장한 절벽 가옥, 여러 층의 석조 건축물과 암벽화 때문인데, 현재 이 유적들은 대부분 포 코너스(Four Corners) 지역인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유타의 국립공원과 기념물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건축물들은 적응력이 뛰어난 아나사지 민족들이 남긴 가시적인 유적에 불과하다. 아마 그동안 사라져버린 유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분산된 소규모 거주지에서 옥수수, 콩, 호박을 재배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토착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다.

  지리, 생태 자원, 기후, 문화적 취양의 지역적 차이는 아나사지 전통을 다양하게 분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지역별로 독특한 도기 장식, 석조 양식, 건축 형식이 생겨났다. 그러한 아나사지의 하위 전통을 담당한 부족들로는 버진, 카옌타, 메사 베르데, 차코, 리오 그란데 등의 분파가 있다. 최대 분포를 자랑했던 11세기 후반 이 분파들은 네바다 남부, 뉴멕시코 중부, 애리조나 북부, 유타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터전으로 삼았다.2)

  하지만 1300년 경 아나사지 인들은 그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항아리며 심지어 옷까지 다 내버리고,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처럼,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3)  뉴멕시코 북서부의 샌 후안(San Juan) 분지에 놀라운 건축물을 남긴 차코(Chaco) 족이  분파들 가운데 가장 먼저인 12세기 중반에 조상의 땅을 버리고 떠났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아직 논쟁이 분분하다. 그리고 이어 13세기 말에 버진, 카옌타, 메사 베르데의 분파들도 포 코너스 지역의 고향을 등지고 남쪽과 동쪽으로 떠났다. 리오 그란데 분파와 콜로라도 고원 남쪽 가장자리의 외딴 촌락들만이 계속 그 지역에서 남았다.4)

  아나사지 인들이 살았던 곳은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고 텅 빈 채 남아 있었다. 거의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바호 족이나 우테 족 같은 새로운 부족이 들어와서 살았고, 그 후에는 스페인을 필두로 해서 유럽 여러 국가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5)

 

 

2. 본론

 

2.1 아나사지 인들은 누구인가?

 

2.1.1. 아나사지 인들의 정체

 

  다른 모든 미국 원주민들처럼 아나사지 인들은 아마도 2만 년 전, 적어도 만 년 전에 시베리아에서 알레스카로 횡단하기 시작한 아시아 사냥꾼들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아시아계의 유목민들은 빙하기 동안 건조한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베링 해를 가로질러 집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북부, 중부, 남부 아메리카를 가로질러 퍼져나갔다. 그 유목인들 중 하나였던 아나사지 인들은 애리조나의 북동쪽과 중심부, 뉴멕시코의 북서쪽과 중심부, 유타와 콜로라도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약 700 BCE~1500 CE 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6)

  아나사지 인들은 이동하는 수렵인 집단에서 농사꾼으로 차츰 변화하였다. 그들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은 권력 집단이나 세습되는 리더 없이 발전되어 왔다. 물론 그들의 문화에는 전쟁과 살육이 있었지만, 전사들에 대한 숭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아나사지 인들의 무덤에는 경제적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고대 아나사지 인들의 평등주의적인 면모가 그들이 온화하고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른 고대인들에 비해 더 인간적이지도, 덜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적의 머리껍질을 벗기기도 했으며, 서로를 대량학살하고, 잔인한 죽음의 의식을 행하였다. 그러나 다른 고대인들처럼 그들은 익살스러운 면도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바위 그림이나 도자기 등에서 잘 나타난다.

  다수의 뼈대와 미라들을 연구한 결과, 이 고대의 아나사지 인들은 현대의 푸에블로 인디언들과 닮았을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몇몇의 증거들로부터 아나사지 인들이 어느 정도 아시아계의 외형인 갈색 눈, 검은 머리, 높은 광대뼈, 황갈색 피부를 지녔음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중간 정도의 신장(남자 평균 5피트 6인치, 여자 평균 5피트)에 대체로 강건한 신체를 지녔다.

  고고학자들은 북부 샌 후안 지역에 거주하던 아나사지 인들의 시기를 두 번의 바구니 제작자 시기(Basket Maker II, Basket Maker III)와 세 번의 푸에블로 시기(Pueblo I, Pueblo II, Pueblo III)로 구분한다.7)

 

 

2.1.2. 바구니 제작자 시기의 아나사지 인들

 

  ‘바구니 제작자(Basket Maker)’라고도 불렸던 초기 아나사지 인들은 옥수수와 호박을 재배하는 농부들이었고, 야생의 씨앗을 채집하는 채집인이었으며, 동시에 조그만 동물들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동굴이나 돌출된 바위에 거주했다. 초기의 아나사지 인들은 창을 가지고 사냥을 했으며, 돌이나 뼈로 도구를 만들기도 하고, 샌들이나 바구니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면으로 된 의복도 입었었다. 그들이 도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바구니는 아나사지 문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아나사지 인들은 매우 촘촘하게 짜여진 바구니에 물을 채운 후, 엄청나게 뜨거운 돌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요리를 했다. 탐험가들이 이들을 ‘바구니 제작자’라 명명하게 된 것도 그들이 조사한 지역에서 발견된 바구니의 엄청난 수 때문이었다.

  500 CE 이전에 존재했던 초기의 아나사지 인들은, 비록 사냥감을 찾아 이동 생활을 했지만, 건축물을 짓고 농사도 지었다. 그들은 수혈가옥(Pithouse)과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들을 지었다. 일가족이 옮겨 다니는 동안 설치류들이 옥수수를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옥수수는 특별히 석관 속에 보관했다. 농경의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아나사지 인들은 이동을 적게 하는 대신 농사를 더 많이 지었다. 바구니 제작자 3기(Basket Maker III)에 이르러서는, 1년 내내 수혈가옥과 지상 창고가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았으며, 근처에 있는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다.

  500 CE경, 아나사지 인들은 도기를 만드는 방법과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법, 남쪽에서 받아들인 콩을 심고 수확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것은 커다란 진보였다. 이들은 도기 덕분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효과적인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활과 화살을 통해 사냥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훨씬 쉽게 고기를 얻게 되었고, 음식을 저장하거나 요리하는 것도 훨씬 용이해졌다. 또, 콩을 재배함으로써 아나사지 인들의 식단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고기와 옥수수, 콩, 호박은 수 백 년 동안 그들의 주식이 되었다.8)

 

 

2.1.3. 푸에블로 시기의 아나사지 인들

 

  초기 푸에블로 시기인 푸에블로 1기(Pueblo I, 700 CE대)동안 아나사지 인들은 하칼(Jacal)이라는 기술을 통해 나뭇가지로 벽을 만들어 지은 지상 가옥에 거주했다. 후에, 그들은 여러 줄의 1층 석조 건축물을 만들어 저장 및 생활공간으로 사용했다. 구덩이로 된 주거지는 날씨가 좋지 않을 때 피난처로 쓰이거나 직물 짜기, 교육, 도구 제작 및 가족 모임의 공간으로도 쓰였다. ‘푸에블로’란 말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나사지 인들의 옛 주거지를 칭할 때 쓴 말로 마을(towns)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푸에블로 시기는 아나사지 인들의 본격적으로 마을에 정착해 산 시기인 것이다.9)

  아나사지 사회에서는 약 700 CE경부터 좀 더 생산적인 옥수수 품종을 재배하게 되고 기후의 변화가 발생한다. 화분분석과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당시 여름철에는 폭우로 인해 강우량이 증가하고 겨울철에는 강우량이 감소했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강의 유량과 유로의 변화를 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아나사지 인들을 규모가 좀 더 크고 영구적으로 물이 흐르는 하천주변으로 이동시켰다. 아나사지 인들은 여름철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구릉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들고 여름철의 많은 물을 통제하고 저장하기 위해 수로와 댐을 축조하였다. 예를 들어 메사 베르데 지역의 챠핀 메사(Chapin Mesa)의 아나사지 인들은 정교한 댐을 건설하여 8~12헥타르의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였다.10)

  푸에블로 2기(900~1100/1150 CE)는 훌륭한 남부 차코의 아나사지 문명이 메사 베르데와 북부 샌 후안(Northern San Juan) 지역에 괄목할 만한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뉴멕시코의 북부 지역에 있는 차코 캐년(Chaco Canyon)은 차코의 푸에블로 2기 문화의 중심지다. 이들 지역의 아나사지 인들은 푸에블로 보니토(Pueblo Bonito) 등 ‘그레이트 하우스(Great House)’라 불리는 대형 건물들을 지었다.  이 지역은 멕시코와 남서부 아메리카 사이의 교역 중심지였다. 도로가 협곡(canyon)으로부터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불리는 위성마을까지 방사상으로 뻗어 있었다. 차코의 영향이 푸에블로 2기 동안에 북부 샌 후안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가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1000년대 후반과 1100년대 전반에 걸쳐 차코 인들은 메사 베르데 지역과 북서부 뉴멕시코를 떠나 산타페 근처의 리오 그란데(Rio Grande) 지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코 캐년의 푸에블로는 1150년에 완전히 버려졌다. 이러한 이동은 아나사지 인들의 두 번째 이동으로 여겨진다. 첫 번째 이동은 북부 샌 후안의 많은 아나사지 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차코 지방에 들어섰던 푸에블로 1기 후반(800년대 중반)의 이동이다.

  1100년대 중반 아나사지 인들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 모여 살았고 푸에블로를 건설했다. 그들의 푸에블로는 조그마한 틈만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방어적 형태를 띠었다. 벽과 들여다볼 수 있는 조그만 틈이 있는 외부의 접근을 거부하는 방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모습은 중세 유럽의 성과 유사하다. 푸에블로 3기(1100/1150~1300 CE)에 아나사지 인들은 절벽에서 살았다. 그들은 절벽 궁전(Cliff Palace)을 지어서 살았는데 2~3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앞에는 많은 키바(Kiva)가 있었다. 이와 같은 절벽 거주지(Cliff Dwellings)는 포 코너스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지어졌다. 이러한 절벽 거주지들이 잘 보존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아나사지 인들은 푸에블로 3기에 살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거주지들은 호븐 위프(Hoven Weep)에 있는 캐년 헤드(Canyon Heads) 주위 지역이나 메사스(Mesas) 등지에 있다.11)

 

 

 

2.1.4. 아나사지 인들의 생활

 

  아나사지 인들은 옥수수, 콩, 호박을 이용하였지만 이들 작물의 재배에 많은 노동력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들은 나무뿌리와 열매, 견과류, 옥수수, 딸기류, 선인장 열매, 해바라기, 사슴, 토끼, 영양, 야생 양 등을 식량으로 이용하였다.12) 그들은 주로 소규모의 사냥을 통해 고기를 얻었다. 보통 사슴, 토끼, 다람쥐, 너구리 등을 잡았으며 때때로 고라니, 산양 등도 잡았다. 약 1000 CE경에 깃털을 얻을 목적으로 가축화(domestication) 된 칠면조 또한 그들의 유용한 식량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된 고기 식량은 창이나 화살, 그물이나 덫을 이용해 잡은 토끼와 사슴이었다.

  고기국도 먹었는데 약한 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끓였다. 고기국의 맛을 더하기 위해 호박, 콩, 과일 등을 넣었다. 또한 양념도 만들어 먹었는데 그 재료로 녹색 야채, 잣, 야생 열매 등을 썼다. 그들의 주식인 콩은 돌로 빻아서 먹었다. 주로 여성들이 납작한 돌 위에다 콩을 놓고 손에 잡힐만한 돌로 빻았다. 그들은 콩으로 우리나라의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옥수수를 구울 때는 다른 것으로 껍질을 쌓아서 구웠으며 고기는 장작불에다 구워 먹었다.

  따뜻한 계절에 여성들은 주로 앞치마를 입고 샌들(sandal)을 신었다. 남자들은 기저귀 형태의 옷을 입었고 마찬가지로 샌들을 신었다. 아나사지 인들의 샌들은 유카 잎 등을 꼬아서 만들었다. 겨울에는 사슴, 고라니의 가죽이나 토끼의 털, 칠면조의 깃털 등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특히 깃털을 이용해 만든 옷은 가볍고 푹신하고 따뜻했다. 이후에 그들은 목화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아나사지 인들은 보석을 사용하였다. 보석에는 새의 뼈, 달팽이 껍질, 갈탄, 터키옥, 적철광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 등이 있었다. 보석은 무역으로 거래되기도 하였다. 태평양 연안으로부터 전복 껍질 등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작은 구리종이 발견되기도 한다. 깃털 또한 중요한 개인 장신구였다.

  아나사지 인들은 바깥생활을 많이 하였다. 그들은 개활지나 주거공간의 지붕 위, 광장 등에서 많은 작업을 하였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주로 키바(Kiva)에서 작업을 했는데 바람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아나사지 인들은 집단을 이루고 또다시 흩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집단을 이루는 기간에도 마을과 그 주변 일대의 거주지의 거주자들을 합쳐도 2000~2500여명의 수를 결코 초과하지 않았다. A. 론 박사는 이 수를 아나사지 인들의 사회구조가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라고 말한다. 거대한 마을은 푸에블로 시기에만 있었다.

  800 CE에서 1000 CE 사이 유럽에서는 고딕 양식의 거대한 교회들이 지어졌다. 같은 기간 미국 남서부에서는 아나사지 인들이 그레이트 키바(Great Kiva)라는 건축물을 지었다. '동족(同族)의 키바(Kin Kivas)'로 알려진 그레이트 키바는 다른 키바들보다 컸고 더 많은 사람들이 숙박할 수 있었다. 오직 대가족만이 그레이트 키바를 이용했다. 그레이트 키바는 또한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공동체나 의식에 사용되었던 또다른 건물에는 돌탑이나 사당 그리고 D자 모양의 구조물 등이 있다.

  몇 마을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도로들은 아나사지 거주지들을 서로 연결했다. 샌 후안 지방의 북쪽에 있는 이 고대 도로들은 현대에 수년간 농경을 해오면서 차코 지방에 있는 도로들보다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사지 인들은 분명 그 훌륭한 도로들은 지었고, 꽤 많은 수의 도로가 아직 남아있다.

  아나사지 인들은 독립적이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농경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옷, 휴식처, 도구들을 직접 만들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보석, 도구, 옷, 항아리 그리고 바구니 등의 개인용품을 자기 마을 사람들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과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아나사지 사회에 마야나 아즈텍의 마을들만큼 시장이 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거래는 존재했다. 많은 교역품들이 발견되어왔기 때문이다.

  물은 언제나 아나사지 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것은 보호해야 하는 자원이었고 그들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절벽에 있는 주거지들과 협곡에 있는 푸에블로들도 주로 물이 충분했던 봄이 지어졌다. 다공질의 바위들에서 새어 나오는 물로 둑을 막으면 연못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나사지 인들은 가문 날씨 동안 푸에블로 위로 흘러가는 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보충했다. 그들이 들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절벽이나 협곡에서 거주했던 것도 그런 지역이 물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13)

  아나사지 인들의 생활에서 눈여겨 볼 현상은 ‘차코 현상(Chaco Phenomenon)’이다. 차코 현상은 지역의 친족 지도자들이 환경의 통상 능력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방법으로써 장거리 교역망을 통제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아나시지 인들은 친족의 유대와 협동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살았는데 또한 구성원들을 위한 의무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의무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차코 현상은 차코의 창고에 갖다 놓는 엄청난 양의 식량의 운반이라든지 푸에블로와 종교적 공간인 키바를 짓는데 필요한 20만 개 이상의 목재 수송이라든지 정교한 묘장 재작 등을 가능케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그들이 소수 엘리트가 철저히 지배하는 사회였는지 혹은 평등사회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적응 체계로써 체계적 협동적 메커니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

 

 

 

2.1.5. 아나사지 인들의 예술

 

  고대에 절벽에 새겨진 그림들은 ‘암석 조각’이라 부른다. 그곳에 그려진 것들은 주로 그림(상형)문자였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아울러 ‘바위 예술(Rock Art)’이라 부른다. 아나사지 인들은 문자를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서 가옥의 담벼락이나 바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의사소통이나 감정을 표현하였다.15) 이러한 아나사지 인들의 바위 예술은 그들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나사지 인들이 새긴 상형 문자들은 수자원이나 방위, 카치나(비의 신) 가면, 사슴 뿔 그리고 이주 경로 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초기 아나사지 시대부터 푸에블로 3기까지 각 기간의 바위 예술들은 각각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예컨대, 넓은 어깨에 좁은 허리를 가지고 있는 그림은 ‘바구니 장인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후기 푸에블로 인들에게는 ‘도마뱀인간’이나 ‘지팡이를 짚은 인간’을 의미했다.

  고대 바구니 제작자 시기에는 바위 예술이 매우 흔하고 정교했다. 당시 아나사지 인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유일한 예술적 표현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기를 제작하게 된 후부터는 그들의 토기가 대표적인 예술의 형태를 띠었다. 토기는 아마도 남서부 멕시코에 분포했던 호호캄(Hohokam)이나 먹이욘(Mogollon) 부족을 통해서 아나사지 인들에게 들어왔을 것이다. 항아리들은 짚을 축축한 진흙 위에 굴린 것과 항아리의 옆구리와 밑바닥으로 쓸 짚들을 꼰 것으로 만들었다. 아마 여자들이 토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나사지 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지만 공통적인 문양을 새김으로써 현대 고고학자들이 토기의 제작 시기를 추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의 토기는 여러 용도로 쓰였다. 요리나 저장을 위한 용기로, 국자나 물통, 꽃병, 심지어는 의식용 도구로까지 사용했다. 그 중 많은 토기들이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물론 조리용 등으로 쓴 대다수는 간단하게 주름 문양만을 새긴 형태였다.16)

  아나사지 인들이 남긴 바위 예술이나 토기는 건축물과 더불어 아나사지 연구에 중요한 정보가 되고 있다. 그들은 역사를 기록해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1.6. 아나사지 인들의 정신 세계와 종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나사지 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은 현존하는 푸에블로 인디언들로부터 얻어진 지식들이다. 아나사지 인들의 관습과 문화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세대에서 세대로 푸에블로의 이야기꾼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아나사지 인들의 기원 신화에 따르면 인간들은 지구 내부의 시파푸(Sipapu)라는 정신세계를 통해 지구 표면으로 나왔다고 한다. 아나사지 인들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또 아나사지 인들은 비의 신 카치나를 초자연적 존재로 숭배해,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면서 풍년과 복을 비는 의식을 수행했다. 그들은 모든 동물과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영혼은 악하게도 선하게도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아나사지 인들은 그들의 삶과 죽음까지도 의식에 의해 통제했다. 의식을 하는 시기는 아마도 겨울에서 여름으로의 아니면 여름에서 겨울로의 태양의 움직임에 의해 정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계절이 변하는 정확한 날들을 알고 있었다.17)

  이러한 아나사지 인들의 고대 의식들은 수세기동안 푸에블로 인디언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오늘날의 인디언들에게는 계급이 없다. 오늘날의 인디언들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아나사지 인들의 의식은 아마도 관습에 따라 모두가 함께 했을 것이다.

 

 

2.1.7. 아나사지 인들의 주거 공간

 

  아름답지만 살기에는 너무도 거칠어 보이는 아나사지의 주거 환경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평평한 대지를 버리고 그 아래쪽의 절벽으로 주거지를 옮긴 극적 변화는 아직도 정확한 이유가 불분명하다.18)

  아나사지 인들은 초창기에는 소규모의 수혈지구(Pithouse)로 이루어진 마을에 살았다. 수혈지구(Pithouse)란 움푹 들어간 집을 말하는데 바구니 제작자 시기나 푸에블로 시기에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지하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말한다. 이곳들은 처음에는 거주지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으로만 사용되었다.

  900 CE 이후로는 방들이 서로 붙어있는 지상 취락, 푸에블로에 많은 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큰집을 갖게 됐고 마을과 이웃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공동생활 단계에 들었으며 이 시기부터가 푸에블로 시기인 것이다.

  대표적인 중심 마을은 메사 베르데(Mesa Verde)이다. 그 중에서도 절벽 궁전이란 곳이 가장 큰 주거 공간이었다. 절벽 궁전은 큰 통 바위 아래로 깊게 파진 곳에 흙벽돌로 쌓아 올려 세운 다층구조의 아파트 형태였다. 4층 구조였으며 방이 220개, 종교 공간인 키바가 23개였다. 이러한 키바의 개수를 바탕으로 상당한 협동 생활, 의식 활동이 있었고 공동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노동단을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궁전의 벽은 규격이 고른 흙벽돌로 쌓았고 틀을 잡기 위한 나무 막대기도 있다. 다층 구조임에도 이곳에는 계단이나 복도 등이 없었다. 또한 내부 구조는 문이나 창이 제대로 없어 아주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키바(Kiva)라는 종교적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나사지 인들은 조상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 그 목적은 비단 조상에 대한 제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데에도 있었다. 또한 키바에는 남자들만 출입을 하였는데 모계사회였기 때문에 어머니 가계의 키바에 참석하였다.19)

  앞에서도 언급했던 그레이트 키바는 바구니 장인들과 푸에블로 인이 지은 의식 장소인 동시에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레이트 키바들은 크고 둥글며 일부는 지하에 있는 구조물들로 덮혀 있다. 몇몇은 직사각형이거나 말굽모양인 것도 있고 구조물로 덮혀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최근에는 덮개가 없는 그레이트 키바들을 '댄스 플라자(Dance Plaza)'라 부른다.

 

 

2.1.8. 아나사지 인들의 이주

  호모 사피엔스는 수백 년 동안 이동해왔다. 신대륙의 콜럼버스 이전의 거주자들은 알래스카로부터 남아메리카의 끝까지 이동했다. 푸에블로 1기의 아나사지 인들은 800년대에 그들의 오래된 푸에블로와 마을로부터 벗어나 흩어졌다. 일부는 새 땅을 찾았다. 나머지는 북부 샌 후안 지역을 벗어나 뉴멕시코 북서쪽에 있는 차코 지역으로 이동했을지 모른다. 차코 아나사지 인들은 차코 캐년과 그 주변 지역을 1000년대 후반에서 1100년대 초반 사이에 떠났고, 푸에블로 3기의 아나사지 인들은 1300년경에 북부 샌 후안 지역을 버렸다. 그 중 마지막 이동은 가장 미스터리한 이동이며 북부 샌 후안 지역에서 일어난 총 세 번의 이동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20)

 

 

 

2.2 아나사지 인들은 왜, 어디로 사라졌는가?

 

2.2.1 환경의 악화

 

  고고학자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나사지 인들이 고향을 떠난 이유에 관해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인 이론을 내놓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대다수 고고학자들이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환경 문제이다.21)

  인구가 늘어나고, 농부들이 차츰 더 넓은 지역에 작물을 재배하다보니 지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주기적인 가뭄이 그들을 덮쳤다.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1276년부터 1299년까지 23년 동안이나 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22) 또 1200년대 초․중반에는 추운 기후가 자주 반복되어 작물 재배 기간이 크게 줄어들었고, 1250년 이후에는 비가 너무 늦게 내려 작물에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1200년대 말에는 지하수가 줄어들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건조 지역과 범람원의 농경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워졌을 것이다.23)

  하지만 이러한 환경적 이유는 설득력을 갖기 쉽지 않다. 환경 악화가 이주를 할 정도로 심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또, 극심한 가뭄이나 기근을 피해 떠난 것이라면 생명과 같은 음식을 두고 갔을 리가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2.2.2. 사회 내부적 충돌

 

  아나사지 인들의 부락 분포를 보면 그들은 무리지어 살았고 그들 사이에 큰 간격과 완충 지대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부락들 사이에는 양질의 토지 확보 등의 이유로 내부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론은 아나사지 인들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그들이 사회 내부적 충돌 직전에 처하자 최선책으로 함께 고향을 떠났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인 『Anasazi America』의 저자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는 1130년 경 몇몇 아나사지 집단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사회 내부적 충돌로 차코 캐년 사회가 붕괴되고 아나사지 인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24)

 

 

2.2.3. 외부의 침략

 

  나바호 족 등 외부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아나사지 후기의 건축물들은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졌고 지나치게 폐쇄적인, 요새의 형태를 띠었다. 이를 외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 브루스 브래들리 박사는 샌드 캐년 푸에블로에서 그 지역 거주민들의 75%가 방어벽 안쪽에서 살았고 이러한 현상이 북부 푸에블로 지역 전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당시 성행했던 터키옥, 구슬 등의 장거리 무역이 갑자기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외부의 적이 존재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적들의 침략을 받았다면 적들이 왜 음식과 다른 귀중품을 그냥 두고 갔는지가 의문점으로 남는다. 또, 아직까지 외부에서 아나사지 인들을 공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25)

 

 

2.2.4. 식인 풍습의 전파

 

  아나사지 인들이 멕시코로부터 전파된 식인 풍습을 두려워해서 이동했다는 이론이다. 아나사지 인들의 유골에는 식인의 흔적으로 의심되는 것들이 많다. 미국의 생화학자이자 분자 생물학자인 리처드 말러 박사는 카우보이 워시 유적에서 발견된 배설물 화석에서 나온 아나사지 인의 근육 조직을 통해 그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러한 식인 풍습은 멕시코의 톨텍 족으로부터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멕시코에서 제작된 톨텍 도기가 차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멕시코 남부에서 온 화려한 깃털을 가진 마코 앵무의 해골도 함께 발견되었다. 멕시코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멕시코 인들이 아나사지와 교류를 했느냐가 아니라 아나사지에 있었느냐인데 이 역시 증명이 가능하다. 아나사지 지역의 유골들 중 당시 톨텍 족의 특징인 날카로운 치아를 가진 유골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볼 때 멕시코의 톨텍 족이 아나사지 인들에게 식인 풍습을 전하였으며, 아나사지 인들은 이러한 식인 풍습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 생각해 이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26)

 

2.2.5. 급속한 경제발전과 무리한 투자

 

  가뭄과 전쟁도 부분적 요인이지만 급격한 경제 발전과 기반시설에 대한 무리한 투자가 차코 멸망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여러 세기 동안 다량의 잉여 옥수수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부추겼다. 급속한 경제발전에 더불어 신흥 상류 계층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기반시설에 무리한 투자를 감행한다. 푸에블로 보니토나 다른 그레이트 하우스들을 보면, 천체학적으로 정확히 평지를 따라 줄지어 있다. 차코 캐년에 존재하는 320km 길이의 도로 시설은 유타 남동부와 콜로라도 남서부까지 이른다. 이러한 기반 시설들은 상당한 양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신흥 상류 계층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으로 강제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노동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 상류층도 함께 망했을 수 있다.27)

 

 

2.2.6. 초자연적 현상 및 종교

 

  14세기에 포 코너스 지역 남부에서는 새로운 종교와 사회 변동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28) 아나사지 인들이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주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초자연적 현상 및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종교적 계시나 예언에 따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들이 사라진 것이 외계인과 관련 있다는 설명도 있다. 호피 족의 전설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류는 4대째 인류이다. 인류는 처음에는 불로, 두 번째는 빙하로, 세 번째는 홍수로 멸망했다. 매번 인류의 한 세대가 끝날 때 인류는 개미 인간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개미 인간들이 아나사지 인들 데려 갔다는 전설인 것이다. 그런데 개미 인간들에 대한 그림은 외계인들의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큰 머리와 작고 단단한 몸통,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그림 중에는 그들 머리에서 나오는 텔레파시를 묘사한 것도 있다고 한다. 어떤 암면 조각을 아나사지 인들이 우주선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즉, 호피족의 전설에 따르자면 아나사지 인들은 우주선을 타고 갔다는 주장이 성립되는 것이다.29)

 

 

3. 결론

  

  아나사지 인들이 어디로, 왜 떠났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인 이론들이 존재한다. 또, 보다 다양한 요인을 제기하는 고고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여러 이론들은 아나사지 인들이 험한 조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났다는 주장과,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주장으로 양분된다. 여러 이론들을 종합해 볼 때 아나사지 인들은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으로 그들의 생산성이 떨어졌음을 인식했고, 예측 불가능한 지역을 떠나 더 안전하고 전망이 밝을 곳에서 살기 위해 이동했다. 아나사지 인들은 물리적․사회적 환경에 자발적으로 대응했다. 조건이 달라져서 이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