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랜드 교수가 본 '한국식 죽음']
"고향 아일랜드선 棺 열어두고 가족·친척·이웃·지인이 떠난 이 얼굴 보며 작별인사
故人에 대한 애도의 자리가 한국선 가장 서글픈 공간으로"
워렌 닐랜드(Neiland·35) 오산대 교수는 작년 6월 고향 아일랜드에 돌아가 외할머니상을 치르고 왔다. 당시 외할머니는 81세. 환갑 때부터 21년 동안 파킨슨씨병을 앓았고 막판엔 폐렴이 왔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마지막 10년은 같은 병을 앓는 한국 노인들보다 훨씬 평온했다. 외할머니는 온몸이 굳어 혼자 몸을 씻거나 용변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도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살던 집에 머물렀다. 나라에서 매주 2~3회 의사와 간호사를 무료로 보내줘서 가능했던 일이다. 병원 갈 일이 생기면 휠체어·자동차·버스·기차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병원 주차도 공짜였다.
막내 이모가 외할머니와 20년 넘게 함께 살며 간병했지만 '일방적인 희생'이 되진 않았다. 정부가 어머니 모시는 비용을 각종 바우처로 지급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2~3주일 동안 할머니는 자식들과 친척들을 차례로 집으로 불러 작별 인사를 했다. 이후 몸 상태가 나빠지고 설사가 잦아져서 1주일간 큰 병원에 입원했다가 마지막 날 집 근처 개인 병원으로 옮겨서 가족을 잘 아는 동네 의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숨을 거뒀다. 의사가 의료용 마약을 처방해 고통 없이 평화로웠다.
닐랜드 교수 가족은 그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장을 치렀다. 하지만 서울에서 흔히 보는 장례와는 많이 달랐다. 첫날은 '패밀리 뷰잉'(family viewing)을 했다. 관을 열어둔 채 가까운 가족·친척만 찾아와 고인의 얼굴을 봤다. 둘째 날은 이웃과 지인들이 검은 옷을 입고 찾아와 고인을 봤다. 그날 밤 장의차로 관을 성당까지 운구했다. 셋째 날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드렸다.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묘지까지 따라갔다. 매장을 마친 뒤 유족이 동네 선술집(pub)에서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냈다.
3일장 내내 '주인공'은 할머니였다. 유족은 장례식장과 성당에 할머니의 옛날 사진을 뒀다. 조문객들이 그걸 들춰보며 추억담을 나눴다. 장례 미사 때 장손자가 추도사를 읽었다. 선술집에 모여서도 다들 고인 얘기를 했다.
닐랜드 교수의 눈에 비친 한국 풍경은 어떨까. 그는 "한국을 좋아하지만 한국식으로 죽거나 묻히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환자 가족이 간이침대에서 새우잠 자며 간호하는 장면, 고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조문객이 북적대는 장면, 5만~10만원씩 현금을 헤아려 흰 봉투에 넣는 장면, 유족과 조문객이 고인과 아무 상관없는 얘기를 나누는 장면, '○○기관 대표 ○○○' 리본이 달린 조화(弔花)가 늘어선 장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풍경이 닐랜드 교수 눈엔 기이하게 비쳤다. 수도권 화장장에 갔을 땐 여러 유족이 한 공간에 뒤섞여 각자 번호표 받고 북적대는 광경에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고인을 보내는 건 굉장히 개인적인(private) 경험인데, 그곳 풍경은 꼭 패스트푸드 식당 같았다"고 했다.
"아일랜드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애도하고 존경을 바치는데 여기선…. 내 인생에서 가장 서글픈 공간이었어요. 복지가 부실한 측면도 있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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