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단 한번의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영혼의 아픔을 느낄줄 아는 사람,,
사랑을 위해 아픔을 아낄수있는 사람,,
기다림에 ,,
아직도 그 기다림에 젖어있는 사람.
우리가 습관처럼 얘기하는 '살아간다'를 의식적으로 '죽어간다'로 바꾸어 부르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죽음과
근접한 경험을 할 때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거나, 죽을 병에 걸렸거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자꾸만
자신에게서 도망간다고 생각할 때 말이다.
어웨이 프롬 허'에서 치매는 아내에게 더 이상 문학적일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다. 그것은 문제는 쉬운데 답은 어려운 세계이다. 그녀에겐 어제의 요일을 기억하는 것도, 오늘 점심으로 먹은 음식을 떠올리는 일도 점점 어려워져만 간다. 그러므로 남편의 반대에도 자발적으로 선택한 요양원은 어쩌면 그녀가 마지막으로 밝힌 생의 의지, 인간의 존엄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양원 면회가 금지된 첫 한 달 동안 아내는 남편 대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남자를 만난다. 과거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못한 수줍은 청년이었다는 말과 함께 아내는 남편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사랑에 빠진 남자에 대해 끝없이 얘기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제 '아내가 연애한다'로 전환된다. 과거에 아내 대신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남편은 "그때, 날 버리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라는 그녀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 낸다. 이제 이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아프게 꽂힌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진 아내에게 남편이 물을 수 있는 죄 같은 건 없다.
치매 환자인 그녀에게서 가장 빠르게 사라지는 건 미래 기억이다. 치매에 걸린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를 그린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선 치매를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되는 병'이라고 말한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는 말이다. 아내를 짝사랑하게 된 남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요양원에 매일 들러, 막 시작된 아내의 연애를 가슴 아프게 관찰한다.
'어웨이 프롬 허'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치매에 걸리면 기억은 현재부터 지워지는 걸까. 왜 까마득한 과거의 일들은 선명해지고, 내 앞의 선명한 사랑은 망각하게 되는 걸까. 이 얄궂은 병의 메커니즘으로 과연 신이 얘기하려는 건 무엇일까.
아내가 있는 남자와 남편이 있는 여자의 죄책감 없는 사랑이 가능해진 건 이들에게 사라진 기억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건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에 빠진 아내가 요양원에서 강제 퇴원당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남편이 선택하는 것은 그 남자의 아내를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연인이 만약 '나를 위해서 이 고통을 끝내게 해줘!'라고 부탁한다면, 만약 방아쇠를 당겨 자기를 죽여달라 부탁한다면, 나는 그를 죽게 해줄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그의 정신이 돌아와 나를 원망하게 된다면? 내 행동이 죄가 되어 내가 감옥에 간다면? 아마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윤리적 관념 속에서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간절히 원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아닐까. 잘 죽는 것이 또한 잘 사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영화 '아무르'의 늙은 남편이 온몸이 굳은 채 고통스레 죽어가는 아내의 머리를 베개로 눌러 죽이는 장면에서 그토록 눈물이 흘렀던 건, 그것이 사랑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슬픔과 공포, 내 죄까지, 상대를 위해 기꺼이 견디고 감당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닐까. 남편은 아내의 또 다른 사랑을 위해 죽음과도 같은 선택을 한다. 아내의 곁에 자신이 아닌 그 남자를 데려다 주는 것 말이다. 도대체 이별을 감당하지 않은 채 시작되는 사랑이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영화를 보다가, 이 신비로운 섬이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의 고향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죽기 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는 것도. 내게 세계에서 가장 젊은 섬나라인 아이슬란드는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비요크와 시규어 로스의 노래를 들으면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만약 내 멋대로 고향을 정할 수 있다면, 이 땅에서 태어났으면 싶었다. 아이슬란드에 가면 어쩐지 내 사랑의 계보학을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신비로운 아이슬란드의 음악과 문학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다가 읽게 된 '살인자의 건강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살인자들로 득실대고 있소.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놓고 그 사람을 쉽사리 잊어버리는 사람들 말이오. 누군가를 잊어버린다는 것, 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소? 망각은 대양이라오. 그 위엔 배가 한 척 떠다니는데, 그게 바로 기억이란 거지. 대다수에게 기억의 배는 초라한 돛단배에 지나지 않는다오. 조금만 잘못해도 금세 물이 스며드는 그런 돛단배 말이오."
기억의 살해와 기억의 자살. 시간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약자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마도 기도일 것이다. 내가 그를 잊지 않도록, 시간이 내 기억을 갉아먹지 않도록, 내가 쓰는 모든 글이 결국 사라지는 기억과 싸우기 위한 투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문득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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